체력의 한계에 도전한 여성 카레이서들
지구의 절반을 여성이 차지하듯, 운전자의 절반도 여성이 차지한다. 여성은 공간지각력이나 운동신경이 떨어져 운전을 잘 못한다는 일부 남성의 편견에도 불구하고 여성 운전자의 수는 더욱 늘어나는 추세다.
하지만 아직도 운전에 대한 성차별이 심한 ‘특수 지역’이 있다. 바로 레이싱 서킷이다. 한국에서도 100명이 넘는 프로와 아마추어 카레이서가 활동하고 있지만, 여성 카레이서의 비중은 3%도 되지 않는다.
앞서 설명했듯이 고속 레이싱을 하는 드라이버에게는 지구 중력의 4배가 되는 힘을 견딜 수 있는 목 근육과 강한 다리, 튼튼한 심장이 요구된다. 남녀의 체력 차이를 무시해도 될 만큼 만만한 운동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러나 모험심 많은 여성들은 모터스포츠를 남성의 전유물로 놓아두지 않았다.
현재 기록에 남아 있는 세계 최초의 여성 레이서는 1928년 부가티(Bugatti) 경주차를 몰았던 체코 출신의 엘리자베스 요네크(Elisabeth Junek)다. 하지만 당시는 출전 자격 심사의 기준이 모호하던 때여서 드라이버로서의 능력을 미리 검증받았는지는 알 수 없다.
국제 규정에 의거해 F1 그랑프리가 출범한 1950년부터 따지면 이탈리아 출신의 마리아 테레사 데 필립스(Maria-Teresa de Filippis)가 세계 최초의 여성 레이서라 할 수 있다. 필립스는 1958년 5월 18일 모나코 그랑프리에 마세라티(Maserati) 250F를 몰고 출전해 F1 역사상 첫 여성 출전자로 기록되었다.
1926년에 태어난 필립스는 1959년까지 5경기에 참가했지만 순위권에 들지 못했다. 1958년 스파 프랑코샹(Spa Francorchamps)에서 열린 벨기에 그랑프리에서 10위에 오른 것이 가장 좋은 성적이었다. 선두와는 무려 두 바퀴 차이가 나긴 했지만 말이다.
필립스는 세기의 여걸이었지만 후원자이자 당시 포르쉐 F1팀 오너였던 장 베하라(Jean Behra)가 베를린의 한 자동차 경기장에서 사망한 뒤 서킷을 떠났다. 그녀는 당시 소속팀이었던 마세라티와의 인연으로 80세가 된 2005년 현재 자동차 오너 모임 가운데 가장 권위 있는 마세라티 클럽’의 회장으로 활동 중이다.
이후 F1에 도전한 여성은 4명이 더 있다. F1에서 최초로 득점을 올린 여성은 렐라 롬바르디(Lella Lombardi)다. 로마 태생인 롬바르디는 1975년 스페인 그랑프리에 포드의 코스워스(Cosworth) 엔진을 얻은 마치(March)팀 경주차를 몰고 나와 예선에서 24위로 부진한 출발을 보였지만 결승레이스에서는 6위로 올라서며 0.5점을 받았다.
1점도 아닌 0.5점이라는 애매한 점수를 받은 이유는 사고 때문이었다. 당시 레이스에서 선두를 달리던 롤프 스토멜렌(Rolf Stommelen)의 경주차가 중심을 잃고 관중석으로 돌진했다. 관중 5명이 사망한 이 사고 직후 경기는 29랩에서 중단되었다. 당시 경기 규정은 경기의 66% 이상을 소화하지 못하면 본래 점수의 절반만 주도록 정해져 있었다(지금은 75% 이상). 스페인 경기는 악몽이 덮친 가운데 33%만 달린 채 중단되었고, 롬바르디는 6위에 주어지는 1점을 다 받지 못하고 0.5점만 챙겼다.
롬바르디에 이어 영국 올림픽 스키 대표 출신인 다비나 갈리카(Davina Galica)가 1976년에서 1978년까지 F1 그랑프리 3경기에 출전했지만 이렇다 할 성적은 거두지 못했다.
여성 F1 레이서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존재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의 데지레 윌슨(Desiré Wilson)이다. 1953년생인 윌슨은 1980년 영국 브랜즈 헤치(Brands Hatch)에서 열린 오로라 F1 대회에서 울프 WR4(코스워스 엔진)를 타고 우승해 F1 머신을 몰고 시상대에 오른 최초의 여성이 되었다. 오로라 F1은 월드 그랑프리는 아니지만 똑같이 F1 머신을 가지고 영국에서 치러진 경기였다.
윌슨은 이후 1992년까지 각종 카레이싱에 참가했다. 특히 르망 24시간이나 IMSA(International Motor Sports Association) 내구 레이스, 챔프카의 전신인 CART 시리즈 등 다른 종목 경기에서도 남성에 뒤지지 않는 활약을 보였다.
최후의 F1 여성 드라이버는 이탈리아 출신의 지오반나 아마티(Giovanna Amati)다. 아마티는 1992년 카얄라미에서 열린 남아프리카 그랑프리에 브라밤(Brabham) 소속으로 출전한 것을 시작으로 그랑프리에 모두 다섯 번 도전했다.
오늘날에는 최고 종목인 F1에 출전하는 여성이 없지만 인디500 등 다른 경기에서는 심심찮게 우먼파워가 발휘되곤 한다. 특히 2005년 인디500에서 4위에 오른 다니카 패트릭(Danica Patrick)은 IRL (인디 레이싱 리그) 드라이버인 사라 피셔(Sarah Fisher)와 함께 북미 자동차 경주 역사상 가장 인기 있는 여성 레이서로 꼽힌다. 패트릭은 인디500에서 89년 만에 처음으로 완주한 여성이었고 성적도 4위권이었다. 특히 경기 당시 23세라는 어린 나이와 깔끔한 용모도 인기의 원동력이 되었다.
서킷 경주에서와 마찬가지로 험악한 랠리에서도 남성을 울리는 철의 여성이 있다. 2001년 다카르 랠리에서 우승한 유타 클라인슈미트(Jutta Kleinschmidt)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다카르 랠리는 15일 이상 사막과 오지를 달리는 장거리 경주여서 체력 소모가 상당히 심하다. 클라인슈미트는 1996년 아마추어로 이 대회에 참가해 코드라이버(운전은 하지 않고 코스를 지도하는 보조 드라이버) 역할을 한 뒤 대자연에 도전하는 모험 정신에 매료되어 매년 참가하고 있는 열혈 여성이다. 그녀는 특히 지옥의 랠리라 불리는 이 대회의 험난한 일정을 소화하면서도 늘 미소를 잊지 않아 다카르 참가자들 사이에서는 ‘선샤인(Sunshine)’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여성의 부드러움과 레이서로서의 도전 정신을 모두 갖춘 셈이다.
한국의 여성 레이서 역사도 의외로 뿌리가 깊다. 한국 여성 드라이버의 원조는 1980년대부터 활동해온 김태옥 여사다. 그녀는 1996년 다카르 랠리에 코드라이버로 참가한 것을 끝으로 현역에서 물러났지만 그 뒤를 잇는 여성 참가자의 명맥은 끊어지지 않았다.
특히 1995년 MBC 그랑프리 한국모터챔피언십(BAT GT 챔피언십의 전신) 시리즈 현대전에서 김주현이라는 여성 드라이버가 한 해 3승을 거두며 시리즈 챔피언에 오르기도 했다. 현재는 2005년 BAT GT 챔피언십 포뮬러 B 종목에 데뷔한 강윤수가 가장 주목받는 여성 드라이버다. 그녀는 데뷔 당시 10대 후반의 젊은 여성 레이서라는 매력 요소로 눈길을 끌었다. 강윤수는 중견 카레이서인 강현택 씨의 딸이기도 하다. 보기 드문 부녀 레이서인 것이다.
여성 카레이서는 어느 나라에서나 아직 특이한 존재다. 때로는 여성 드라이버가 실력보다는 희귀성을 노린 마케팅을 앞세운다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다. 이처럼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 베르타 링게(Bertha Ringer)라는 독일 여성의 얘기를 들려주고 싶다. 세계 최초의 가솔린차를 개발한 칼 벤츠의 아내였던 링게는 1888년 남편이 개발한 차를 몰고 90km나 되는 거리를 테스트 주행해 가솔린차가 상용화될 수 있음을 입증했다. 세계 첫 가솔린차의 테스트 드라이버는 여성이었다.
서킷의 꽃 레이싱걸
자동차 경기장에서만 만날 수 있는 레이싱걸은 모터스포츠 문화의 한 부분을 이루는 독특한 존재다. 특히 한국에서는 카레이서보다 레이싱걸이 더 많은 인터넷 팬카페를 거느리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기도 하다.
레이싱걸은 흔히 ‘걸어다니는 광고판’으로 불린다. 모터스포츠는 철저하게 상업적인 시스템으로 운영되는 스포츠다. 레이싱팀이나 레이서에게 돈을 대는 기업들은 그에 상응하는 홍보 효과를 거두기 위해 입체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그 결과물 가운데 하나가 레이싱걸이다. 팀 성적이 나빠서 언론의 관심을 끌지 못해도 후원사 로고를 아슬아슬한 유니폼 한 곳에 새겨넣은 레이싱걸을 앞세우면 관중이나 카메라 기자의 눈길을 끌 수 있다. 레이싱걸이 언제부터 등장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자동차나 모터스포츠를 좋아하는 팬의 90% 정도는 남성이다 보니, 이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미녀를 동원하게 된 것은 자연스런 일임에 분명하다.
국가별로 자동차 경주 문화가 조금씩 다른만큼 레이싱걸을 바라보는 시각에도 차이가 있다. 한국과 일본, 미국 등은 유럽 국가에 비해 레이싱걸의 노출이 심하고 동원되는 인력도 많다. 특히 일본의 경우 레이싱퀸이나 이미지걸이 사회적인 섹시코드로 자리잡고 있다. 톱 모델 가운데 한 명인 요시오카 미호나 정상급 록그룹 자드(ZARD)의 보컬 사카이 이즈미 등 많은 인기 연예인이 레이싱걸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F1 그랑프리의 핵심 지역인 유럽에서는 레이싱걸의 존재감이 생각보다 크지 않다. 유럽의 레이싱걸들은 출발선에서 경주차의 엔트리 넘버가 적힌 피켓을 들거나 드라이버들에게 양산을 씌워주는 역할만 한다.
현재 국내에서 활동하는 레이싱걸은 40~50명 정도다. 레이싱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이들을 사업화한 전문회사도 생겼다. 2005년 3월 설립된 ‘GLP&P’ 사는 본격적인 ‘걸 비즈니스’를 표방하며 35명 정도의 레이싱걸을 관련기업과 경주팀에 공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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